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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지중해의 순례화가 : 엘 그레코(El Greco)

by 비키퍼 202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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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Greco 엘 그레코
가슴에 손을 얹은 귀족(마드리드, 프라도 국립미술관)

 

 

그리스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는 당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 중 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후기의 미미한 이탈리아 화가들보다 엘 그레코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적다. 그 이유는 보통 3가지이다. 첫째, 그는 1577년 스페인 톨레도에 정착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지중해를 떠돌며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즉, 예술적 “순례”를 해왔다. 둘째, 스페인에는 이탈리아에 비해 르네상스(문예부흥)가 늦게 찾아왔는데, 이에 따라 엘 그레코에 대한 문인들의 비평이나 저술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셋째,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이전의 스페인에는 판화의 발달이 이뤄지지 않아서 엘 그레코의 작품을 충분하게 생산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El Greco)는 이탈리아어로 “그리스 사람”이란 뜻이다. 비록 그가 40년을 넘게 스페인에 정착해 살았지만, 이탈리아어로 지어진 별명이 더 유명한 것은 그의 “순례” 때문에 생긴 아이러니이다. 그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로 1514년 당시 베네치아 공국의 소속이었던 크레타의 수도 칸디아(현재의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지중해는 유럽의 지리적 중심지로, 로마 카톨릭 문화, 동방정교 문화 그리고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무역을 통해서 번영을 누렸으며 여러 문화의 세력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문화교류의 중심지와 여러 세력의 균형점으로 역할해오고 있었다.

엘 그레코는 이러한 문화의 영향 아래 미술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이콘화(종교·신화 등의 관념체계를 바탕으로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양식 혹은 작업)의 장인으로 먼저 시작하였다. 이후 베네치아를 방문한 3년 동안 당대 대표적 화가인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등 여러 르네상스 대가들의 화풍의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질 좋은 재료와 꼼꼼한 기법으로 제작된 그의 베네치아 풍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시점부터 엘 그레코는 비잔틴 이콘 화가에서 서양 라틴 화가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엘 그레코는 로마에서 활동하며 ‘빈센초 아나스타지’라는 초상화를 그렸는데, 별 장식없이 단지 빛만으로 방을 표현한 방식의 그림으로 그림 속의 인물을 잘 표현한다.


초상화는 물론 여러 그림에서 뛰어는 실력을 보인 그였지만 당시 내로라는 화가들로 넘쳐나는 로마에서 후원자를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일례로, 유명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의 ‘최후의 심판’을 미켈란젤로 만큼이나 완벽하고 새롭고 더 근엄한 가톨릭 이론에 맞추어 다시 그리겠다는 그의 제안은 교황 피우스5세로부터 무시와 미움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를 떠나야만 했다.

1600년대 바로크 예술이 급부상 하기 전, 이탈리아에서는 경제적 문제와 더불어 예술가들 사이의 경쟁으로 많은 자국 출신 예술가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그중 가장 유망한 행선지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스페인이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은을 수입해온 스페인의 자본력은 압도적이었다. 엘 그레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 예술가들은 높은 위상을 가졌고 지식인으로서, 창작자로서 자유롭게 자신의 독창적 표현을 피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 군사적으로 급부상하던 스페인은 여전히 문화적으로는 후진적이었다.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요, 후원자가 원하는 그림을 제작해서 제공하는 수공업자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예술적 자양을 얻어서 성장한 엘 그레코는 자신을 지원하던 스페인왕실과 그런 부분에서 소소한 마찰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펠리페 2세는 그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톨레도(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남쪽 타호강에 면한 도시)에 정착한 엘 그레코는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가 되기를 꿈꿨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여러 후원자들과 깊은 인간적 유대를 토대로 오늘날 잘 알려진 다양한 명화들이 이 시기 탄생하게 된다. 왕실의 간섭으로 정해진 화풍을 벗어날 수 없고 각종 부수적 업무에 시달려야 했던 궁정화가와는 달리 화가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표현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이미 존재하는 주제를 독창적으로 변형했다는 점, 혁신적이고 새로운 시각 언어를 실험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고령이 되어서도 초기 이콘화 작가 시절의 화풍을 작품에 실험적으로 도입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유명한 현대 추상화가 피카소(Pablo Ruiz Picasso)는 그의 작품에서 엘 그레코를 암시하는 그림을 종종 남겼으며, 심지어 자신과 엘 그레코를 동일 시 하기까지 했다. 둘 다 지중해 출신의 화가들이었으며, 유랑을 통해 예술적 여정을 이어간 화가들이었다.

엘 그레코의 예술의 원천은 그의 ‘고향을 떠나있다는 점’에서 나왔다. 그는 비잔틴 전통의 이콘 화가라는 명백한 제약점을 서양 예술의 흐름 속에서 장점으로 녹여냈다. 그리고 다른 문화가 섞인 단순한 ‘혼성물(hybrid)'을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양식으로 빚어냈다.

 


그의 이러한 예술적 업적은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나서야 평가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많은 예술 감상자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998년 유명한 전자음악 뮤지션 반젤리스(Vangelis)는 "El Grego"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발매했는데, 판매수익금 전액은 그리스 박물관에 있는 엘 그레코 그림 3점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음악은 느리고 온화하고 진지하여 엘 그레코가 헌신한 세계를 향한 송가의 성격을 가진다. 신시사이저 소리는 모두 고전적인 악기를 연상시키지만 그 기원을 암시할 뿐이다. 그 결과, 매우 비잔틴적으로 느껴지지만 이 시대의 방식으로도 느껴진다. 소프라노 몽세라트 카발레(Montserrat Caballé)와 테너 콘스탄티노스 팔리아타라스(Konstantinos Paliatsaras) 등 두 명의 클래식 음악 성악가들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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